끄리앙삭 차마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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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끄리앙삭 차마난은 1917년 태국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77년 쿠데타로 타닌 끄라이위치안 총리를 몰아내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태국 총리를 역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공산주의자 사면, 중국, 소련 등과의 외교 관계 수립,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힘썼다. 1980년 경제 문제로 인해 자진 사임했으며, 다양한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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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리앙삭 차마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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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본명) | 솜칫 차마난 |
출생일 | 1917년 12월 17일 |
출생지 | 나콘차이시, 타완톡, 시암 (현재의 므앙사뭇사콘군, 사뭇사콘주, 태국) |
사망일 | 2003년 12월 23일 |
사망 장소 | 쭐랄롱꼰 왕립 기념 병원, 빠툼완구, 방콕, 태국 |
배우자 | 위라트 차마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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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직위 | 태국의 총리 |
임기 시작 | 1977년 11월 11일 |
임기 종료 | 1980년 3월 3일 |
국왕 | 푸미폰 아둔야뎃 |
이전 | 타닌 끄라이위치안 |
다음 | 쁘렘 띤술라논 |
국방부 장관 | 국방부 장관 |
국방부 장관 임기 시작 | 1977년 8월 11일 |
국방부 장관 임기 종료 | 1979년 5월 11일 |
국방부 장관 이전 | 렉 네아우말리 |
국방부 장관 다음 | 쁘렘 띤술라논 |
내무부 장관 | 내무부 장관 |
내무부 장관 임기 시작 | 1976년 11월 12일 |
내무부 장관 임기 종료 | 1980년 8월 11일 |
내무부 장관 이전 | 사막 순다라베지 |
내무부 장관 다음 | 렉 네아우말리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1940년–1980년 |
지휘 | 태국군 최고 사령관 |
태국군 최고 사령관 임기 시작 | 1977년 10월 1일 |
태국군 최고 사령관 임기 종료 | 1978년 9월 30일 |
태국군 최고 사령관 이전 | 카몰 테차퉁카 |
태국군 최고 사령관 다음 | 섬 나 나콘 |
2. 어린 시절 및 교육
끄리앙삭 차마난은 1917년 12월 17일 사뭇사콘주 므앙사뭇사콘군의 마하차이 하위 구역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방콕 남서쪽에 위치한 주요 화교 무역항 지역이었다. 그의 가족은 태국과 서방 국가, 일본 사이의 상품 수출입을 담당하는 마하차이 무역 회사를 운영하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하차이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태국의 주요 무역항 중 하나였으며, 1897년에는 태국 최초로 자치 정부를 갖춘 도시 구역으로 성장하기도 했다.[36]
2. 1. 교육
6세부터 12세까지 사뭇사콘 위타얄라이와 파툼콩카 학교에 다녔다.[36][9] 초등학교 졸업 후, 끄리앙삭은 방콕으로 이주하여 학문적으로 명성이 높고 태국 총리 6명을 배출한 암누아이 실파 학교에 진학했다.[9]이후 그는 쭐라촘클라오 왕립 육군 사관학교( โรงเรียนนายร้อยพระจุลจอมเกล้า|롱리안 나이 로이 프라 쭐라촘끌라오th )에 입학하여 1938년에 졸업했다. 이 학교는 당시 강도 높은 훈련 프로그램과 태국 교육 기관 중 가장 낮은 입학률로 알려져 있었다.[36][9] 군 복무 중에는 태국 육군 지휘참모대학(CGSC)과 태국 국방대학에서 추가로 수학했다.[36][9]
한국 전쟁 참전 이후에는 미국 캔자스주 포트 리븐워스에 위치한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유학했다. 이 대학은 미국 육군 및 자매 부대 장교, 정부 기관 대표, 국제 군사 장교를 위한 대학원 과정 교육기관이다.[9] 끄리앙삭은 이곳에서 많은 국제적 인맥을 쌓으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36]
3. 군사 경력
끄리앙삭 차마난은 6.25 전쟁에 태국 육군 제21보병연대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며, 그의 부대는 용맹함으로 "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0] 그는 소령으로서 모범적인 기량을 보여주며 돼지찹 언덕 방어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37][10] 1953년 3월 15일, 당시 미국 대통령의 지시와 미국 의회의 1942년 법률 조항에 따라, 당시 육군 중위였던 끄리앙삭은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미국 공로 훈장 (장교 등급)을 수여받은 몇 안 되는 비(非)미국 군인 중 한 명이 되었다.[37][10]
그는 1973년에 육군 대장이 되었고, 1년 뒤인 1974년에는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31][1] 또한 1974년, 미얀마 정부와 비밀리에 포로 교환을 중개하여 아편 군벌 쿤사에게 납치되었던 두 명의 소련 의사들을 석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쿤사는 의사들의 석방 대가로 몸값을 지불했다.[38][11]
1977년, 끄리앙삭은 국가행정개혁회의(NARC)의 일원으로서 타닌 끄라이위치안 총리에 대항한 성공적인 쿠데타에 참여했다.[39][12] 타닌은 1976년 태국 쿠데타로 쌍앗 찰로유에 의해 입헌 군주제가 중단된 후 집권한 인물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NARC는 극우파가 아닌 온건한 군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과거 정치에 개입했던 파벌들과 달리 군 내부의 권력 관계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을 보인 집단으로 평가받았다.[36][9]
4. 총리 재임 (1977-1980)
1977년 10월, 상갓 찰로유 제독이 이끄는 군부는 타닌 끄라이위치안 총리 정부를 쿠데타로 축출했다.[39]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31] 끄리앙삭 차마난 장군은 쿠데타를 주도한 국가행정개혁위원회(NARC)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쿠데타 성공 후 국민의회와 NARC의 지지를 받아 태국의 제15대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로서 끄리앙삭은 전임자 타닌의 강경 노선에서 벗어나 국가 통합과 화해를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특히 태국 공산당(CPT)과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사면 조치 등을 통해 공산 반군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4][15] 중국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태국 내 공산 반군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중단시키는 대가로, 태국이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에 대한 중국의 무기 수송을 묵인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16][17]
외교적으로는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등 주변 공산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한편, ASEAN 회원국들과의 유대를 강화했다.[18] 또한 중국, 소련, 미국 등 주요 강대국들과의 균형 외교를 추구했다. 그러나 1978년 말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정세를 급변시켰고, 태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작용했다. 이에 끄리앙삭 정부는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19][25] ASEAN 국가들과 공조하여 베트남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19]
베트남의 침공은 대규모 캄보디아 난민 발생으로 이어졌고, 끄리앙삭 정부는 1979년 10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난민들에게 임시 피난처를 제공하는 '개방 정책'을 선언했다.
그러나 유가 상승과 인플레이션 등 경제 문제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잃으면서, 끄리앙삭은 1980년 2월 의회에서 자진 사임을 발표했다.[17][12][26] 군부 지도자가 쿠데타가 아닌 방식으로 스스로 물러난 것은 태국 현대사에서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으며,[12][26] 그의 뒤를 이어 쁘렘 띤라술라논 장군이 총리직을 승계했다.
4. 1. 쿠데타와 집권
1977년, 국가행정개혁위원회(NARC)는 타닌 끄라이위치안 총리를 상대로 성공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39] 타닌 정권 하에서 태국 공산당(CPT)과의 내전이 심화되고 캄보디아, 라오스와의 국경 충돌이 잦아지는 등 국가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히 타닌 정부의 강경한 탄압 정책은 오히려 농촌 지역에서 CPT의 지지 기반을 넓히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왕족과 측근들까지 공산 반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왕비의 비서가 암살당하고 국왕의 남부 지역 방문 중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국내 불안정과 공산 반군의 활동 증가는 군부 내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1977년 3월에는 찰라드 히라냐시리 장군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처형되기도 했다.결국 1977년 10월 20일, NARC는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 직위에 있던[31] 끄리앙삭 차마난 장군은 NARC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NARC는 극우 성향보다는 온건파 군부로 평가받았으며, 이전의 군부 집권 세력과는 달리 군 내부의 권력 관계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했다.[36][40] 쿠데타는 '젊은 터키인'으로 불리던 소장파 장교들이 끄리앙삭과 상갓 찰로유 장군(1976년 쿠데타를 이끌어 세니 프라모 문민 정부를 축출하고 왕족이 선호하던 타닌을 총리로 임명했던 인물)에게 압력을 행사하며 이루어졌다. 쿠데타 성공 후, 끄리앙삭은 국민의회와 NARC 양측으로부터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여 태국의 새로운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직에 오른 끄리앙삭은 전임자 타닌의 가혹했던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 국가 통합을 위한 화해 정책을 추진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타닌의 강경책으로 인해 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의 공산 반군에 합류했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였다. 1978년, 그는 우익 세력의 상당한 반발 위험에도 불구하고 '방콕 18인'의 석방을 위한 사면 법안을 국립 입법부에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방콕 18인'은 1976년 쿠데타 직전 발생한 탐마삿 대학교 학살 사건 이후 투옥되었던 좌익 성향의 학생 및 노동 운동가들이었다. 이 조치는 끄리앙삭이 인도주의적 지도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공적인 사면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국내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했다.[14][15]
끄리앙삭은 태국 북부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공산 반란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9년, 그는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과 만나 비밀 협상을 진행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협상의 내용은 중국이 캄보디아의 반군 크메르 루주에 무기를 수송하는 것을 태국이 묵인하는 대가로, 중국은 태국 내 공산 반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16][17] 당시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를 비롯한 일부 외신은 이러한 거래가 실제로 있었다고 확인 보도했으나,[17] 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하며 공산 반란 세력의 약화는 끄리앙삭 정부의 통합 정책과 사면 조치의 성공적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한편, 끄리앙삭은 미얀마 국경 지역의 반군 세력과도 비밀리에 접촉하여 미얀마로부터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한 완충 지대를 확보하려 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17]
4. 2. 외교 정책
끄리앙삭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외교 관계의 정상화와 개선이었다. 그는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같은 ASEAN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육성했다.[18] 또한, 그는 비공산권 국가 지도자로는 드물게 중국과 소련을 모두 방문하여 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78년 3월 말 베이징 방문에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이 태국을 답방하여 끄리앙삭의 자택에서 회담하며 양국 관계의 진전을 보여주었다.[18] 이를 통해 끄리앙삭은 중국이 태국 내 공산 반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초기에는 주변 공산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1975년 4월 크메르 루주 정권을 인정하고,[19] 1978년 1월에는 베트남과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19] 그러나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하면서 인도차이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노력은 중단되었다.[19]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태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끄리앙삭은 국방 능력 강화에 나서는 한편,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1979년 2월 방미 시 지미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확보했다.[19][25]
끄리앙삭은 지역 이웃 국가들과 중요한 경제적 협력도 이끌어냈다. 말레이시아 총리 툰 후세인 온과 태국-말레이시아 국경 및 타이만 석유 시추권에 관한 조약을 체결할 당시, 치앙마이의 한 국수 가게에서 격식 없이 조약에 서명한 일화는 그의 실용적인 외교 스타일을 보여준다.[17]
4. 2. 1. 미국과의 관계
끄리앙삭 집권 이전,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후 동남아시아 본토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축소하고 있었다. 1973년 민중 봉기를 주도한 학생 시위대는 미국의 군사 기지 철수를 포함한 태국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요구했고,[20] 이는 이후 태국 정부의 정책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1974년 5월까지 태국 주둔 미군은 34,000명으로 감축되었고, 태국 정부는 미국의 완전한 군사 철수 의사를 내비쳤다.[21]세니 프라모와 쿠릿 프라모 총리 시기(1975-1976년), 태국 정부는 미국 기지의 완전 철수, 북베트남과의 관계 개선, 중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등을 추진하며 미국과의 거리를 두었다. 특히 1975년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태국 내에서는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회의론과 반미 감정이 고조되었다. 당시 슐레진저 미국 국방장관이나 키신저 국무장관 등 고위 관리들은 태국 방어 약속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보였고,[22] 마이크 맨스필드 상원 다수당 대표는 마닐라 조약 폐지와 대(對)태국 경제 원조 중단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결국 1976년 태국 내 미군은 완전히 철수했으며,[23] 1977년에는 SEATO가 공식 해체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약화되었다.
1977년 11월 쿠데타로 집권한 끄리앙삭은 이전 타닌 꺼이위치안 정권의 경직된 노선과 달리, 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는 미국뿐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등 주요 강대국들을 방문하며 균형 외교를 추구하는 한편, 약화된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끄리앙삭은 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미국 측에 강조하며, 미국이 태국에 대해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설득했다.
끄리앙삭의 이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미국은 태국 및 아세안과의 관계 강화가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미국은 태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복원하고, 역내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주의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끄리앙삭 총리 임기 말에는 양국 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긴밀하고 우호적으로 회복되었다. 비록 일부 반미 감정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타놈-프라팟 정권 시절에 비해서는 크게 완화된 상태였다.[24]
4. 2. 2. 주변국과의 관계
1976년 태국 쿠데타 직후 국가행정개혁위원회 사무총장이었던 끄리앙삭은 이전 정부의 강경한 반공주의 노선과 달리 데탕트 정책을 다시 강조하며 주변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보였다. 그는 "우리는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으며, 중국과의 관계는 변함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러나 당시 캄보디아를 장악한 크메르 루주 정권은 베트남, 라오스, 태국과 동시에 국경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태국 국경에서도 크메르 루주 군대에 의한 침범과 충돌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국 정부, 특히 끄리앙삭은 베트남과는 다른 대응 방식을 보였다.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의 도발에 대해 전적으로 군사적인 대응을 선택하여 결국 전면전과 캄보디아 침공으로 이어진 반면, 태국은 국경 침범에 대해 항의하면서도 외교적 해결책을 꾸준히 모색했다. 끄리앙삭은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주 정권)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 베트남으로부터 온다고 판단했으며, 크메르 루주 역시 생존을 위해 결국 태국과 타협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태국 정부는 크메르 루주의 계속되는 국경 침범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와의 관계 개선 노력을 오히려 가속화했다. 태국은 국경 침범 사건에 대해 프놈펜 중앙 정부와 국경 지역 간의 혼란이나 의사소통 부족, 또는 부정확한 지도 때문일 수 있다는 설명을 내놓으며 사태를 축소하려 노력했다. 태국인 50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항의" 대신 "보고서"를 보내는 유연성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1978년 1월 말 우파딧 파차리양쿤 태국 외무장관이 프놈펜을 "친선 방문"한 이후 양국 국경의 군사적 긴장이 점차 완화되었고, 마침내 대사 교환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 사건 이후 끄리앙삭의 베트남에 대한 입장은 이전의 유연하고 타협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매우 확고해졌다. 인도차이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노력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한편, 끄리앙삭은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도 힘썼다. 1979년 2월 6일, 그는 미국을 국빈 방문하여 지미 카터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동남아시아에서의 긴밀한 역사적 관계뿐만 아니라 경제 및 지역 협력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25]
4. 3. 캄보디아 난민 문제
1978년 12월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리고 헹 삼린 정권을 수립하자, 1979년과 1980년 사이 대규모 캄보디아 난민이 태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전쟁, 기아, 질병을 피해 약 20만 명의 캄보디아 난민이 태국 국경으로 몰려든 것으로 추정되었다.1979년 10월 18일, 끄리앙삭 차마난 총리는 태국-캄보디아 국경 지역을 직접 방문했다. 이틀 뒤인 10월 20일, 그는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캄보디아 난민에게 임시 망명을 허용하는 새로운 "개방 정책"을 선언하며 기존의 난민 정책을 변경했다. 태국 정부는 이들을 공식적인 난민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수용 센터"를 설치하여 관리했다. 10월 22일에는 태국군 대령이 유엔난민기구(UNHCR)에 연락하여, 끄리앙삭 정부가 국경에 있는 캄보디아인 9만 명을 추가로 수용하기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태국군은 이들을 사 깨오 마을 근처 부지로 이송할 계획을 세웠다. 사 깨오 수용 센터는 국경에서 서쪽으로 약 64km, 방콕 동쪽에서 도로로 209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그러나 끄리앙삭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태국 정부는 최악의 강제 송환 사례 중 하나로 지목되는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쁘레아 비헤아 사원 인근에서 최대 45,000명에 달하는 캄보디아 난민을 강제로 추방하여,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지뢰밭을 통과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3,000명 이상의 난민이 사망했으며, 송환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태국 군인들에게 사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4. 4. 사임
끄리앙삭 차마난은 1980년 2월, 유가와 전기료 등 물가 상승으로 인해 국민의 지지를 잃자 자발적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7][12][26] 그는 의회 특별 회의에서 자신의 정부 정책에 대한 신임 투표를 앞두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총리직에서 사임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으며, "다른 유능한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27]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가 스스로 물러난 것은 태국 역사상 이례적인 일로 평가받으며, 그의 결정은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12][26] 그의 뒤를 이어 오랜 측근이었던 쁘렘 띤라술라논 장군이 총리직을 승계했다.5. 훈장
끄리앙삭 차마난은 태국 및 여러 국가로부터 다양한 훈장을 받았다. 주요 수훈 내역은 다음과 같다.
국가 | 훈장 리본 | 훈장명 | 등급/종류 | 수여 연도 |
---|---|---|---|---|
태국 | 출라 촘 클라오 훈장 | 기사단 1등급 | 1978년 | |
태국 | 백상 훈장 | 기사단 특등 | 1974년 | |
태국 | 왕관 훈장 | 기사단 특등 | 1968년 | |
태국 | 승리 훈장 - 태평양 전쟁 | 1962년 | ||
태국 | 승리 훈장 - 한국 전쟁 | 1953년 | ||
태국 | 자유 수호 훈장 | 1등급 | 1978년 | |
태국 | 국경 근무 훈장 | 1968년 | ||
태국 | 차크라 말라 훈장 | 1953년 | ||
태국 | 와지라 보이 스카우트 표창 훈장 | 1등급 | 1978년 | |
태국 |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왕실 암호 훈장 | 1등급 | 1978년 | |
미국 | 은성 훈장 | 1952년 | ||
미국 | 육군 대통령 부대 표창 | 1952년 | ||
미국 | ![]() | 공로 훈장 | 장교 | 1969년 |
유엔 | 유엔 한국 봉사 훈장 | 1953년 | ||
말레이시아 | 말레이시아 왕실 충성 훈장 | 사령관 | 1967년 | |
말레이시아 | 국가 옹호자 훈장 | 명예 대사령관 | 1979년 | |
대한민국 | 국가안보훈장 | 통일장 | 1977년 | |
대한민국 | 한국 전쟁 참전 훈장 | |||
필리핀 | 시카투나 훈장 | 그랜드 칼라 | 1978년 |
또한 한국 전쟁 60주년인 2013년에는 외국인 전투원으로 인정받았다.
참조
[1]
뉴스
Kriangsak Chamanand, Thai General, Dies at 86
https://www.nytimes.[...]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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